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마시타 도모유키 (문단 편집) == 행적 == 코우치현 나가오카군 오오스기촌(현 오오토요 쵸) 출신이며 코우치현 해남중학교, 히로시마 육군유년학교, 육군중앙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18기), 육군대학교(28기)를 졸업후 [[스위스]], [[독일]]로 유학한다. 귀국후에는 육군성 군사과장, 군사조사부장등을 역임했다. 그는 [[싱가포르 전투]]에서 기동전으로 대활약을 펼치며[* 소위 일본판 전격전이라고 한다.] '''말레이의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때 싱가포르를 함락한 이후 [[영국군]] 총사령관이었던 [[아서 퍼시벌]] 장군에게 ''''예스냐? 노냐?''''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해졌지만, 실제로는 와전된 보도로, 정작 야마시타 본인이나 그 협상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그런 발언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공산당 할 거야 안 할 거야|항복할 거야, 안 할 거야!!]]"'''라고 발언했다는 증언은 있다. Thames Television에서 만든 World at War, Bazai 편을 보면 협상에 참여했던 일본군 장교의 그 때 상황에 대한 인터뷰가 나온다. 야마시타와 퍼시벌이 포드 공장에서 만나서 협상을 하는데 퍼시벌 장군이 항복을 언급하지 않고 딴소리만 하며 시간을 끌자 인내심이 바닥난 야미시타가 책상을 쾅 치면서 ''''항복할 거냐 안 할 거냐'''' 라고 호통을 쳤고, 퍼시벌이 다시 대답을 돌리자 같은 발언을 반복하며 항복하지 않으면 야간공격을 감행하겠다고 협박한 끝에 퍼시벌이 항복 의사를 밝혔다는 인터뷰가 나온다. 후에 밝혀진 바로는 다음과 같다. 1942년 2월 15일 일본군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영국군 사령관 아서 퍼시벌이 포드 자동차 조립공장 사무실에서 항복 협상이 시작되었다. 퍼시벌은 이런저런 조건을 제시했는데, 그 가운데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영국인 보호를 위해 영국군에게 치안을 맡겨달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때 통역을 맡은 통역관이 기초적인 군사용어도 모르는 데다 레벨이 너무 낮아 양측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유명한 '예스까 노까'라는 말은 바로 이때 나온 말인데, 알려진 것처럼 야마시타가 퍼시벌에게 강압적으로 대놓고 윽박지른 게 아니고, 버벅거리는 통역에게 "복잡하게 말하지 말고 항복할 건지 아닌지 '예스까 노까'로 간단히 물어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장면을 창밖에서 취재하고 있던 기자가 각색(脚色)과 분식(粉飾)을 가미해, "야마시타, 퍼시벌에게 예스까 노까를 요구!" 하는 식으로 타전한 것이 야마시타가 퍼시벌에게 강압적으로 윽박지른 것처럼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결과론이지만 통역관과 기자가 '예스까 노까'라는 말을 만들어낸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야마시타가 후일 회견했던 일을 친구에게 말하면서 '예스까 노까'와 관련하여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의 '예스까 노까'를 창밖에서 본 사람 가운데에는 야마시타가 승리에 도취되어 으스대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오만한 태도로 비쳤을 수도 있다. 그렇게 봐도 나로선 어쩔 수 없지만, 신문에 '예스까 노까'로 집요하게 쓴 것에 대해서는 두 손 들었다. 지금까지 이것과 관련하여 단 한 번도 변명한 적은 없지만, 진실을 알릴 수 없는 것은 씁쓸하다." 평소에 일본군 현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다녔지만, 황도파 출신이라는 이유로 통제파인 [[도조 히데키]]에게 견제를 받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2.26 사건]]의 주동자들에 대해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쇼와 덴노|히로히토 덴노]]도 야마시타를 꺼려서 [[싱가포르]]의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덴노 접견조차 하지 못하고 한동안 [[만주]]로 좌천되어[* 그것도 싱가포르에서 만주의 벽지로 직행하도록 강요받다시피 했다. [[전역|사실상 옷을 벗으라는 압박]]인 셈.] 활약할 기회가 없었다. 이후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만주에서 다시 불려와 [[필리핀]]에서 방어전을 지휘하게 되었으나 이미 패전이 거의 확실시된 상태라 그의 능력으로도 어떻게 수습할 도리가 없었다. 최초 방침이었던 루손 결전(혹은 지연전)도 [[대만 항공전|대만 해협 항공전]]에서 일본이 거짓말로 승리했다고 하자[* 실제로는 일본군의 참패였다. 대만 항공전에서 미군의 피해는 군함들의 손상과 장병들의 피로도 밖에 없지만, 일본군은 3일만에 500대 이상의 비행기 자체가 사라져서 이후 필리핀 전역과 오키나와 전투에 영향을 전혀 끼치지 못했다. 그리고 [[대만 항공전]]의 미군측 지휘관인 제 3 함대 사령관 [[윌리엄 홀시]] 제독이 태평양 함대에 그 희대의 드립성 보고를 전문으로 보낸 항공전이기도 하다.] [[대본영]]이 계획을 변경하는 바람에 휘하 병력이 레이테 섬 전투에 투입되면서 무산되었다. 병력의 태반은 수송 과정에서 수장당하거나 섬에 고립된 채 아사하는 등 제대로 된 전투조차 해보지 못하고 괴멸했다. '''투입병력 8만 1천명 중에서 1천명 만이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필리핀 탈환전|필리핀 방어전]]에서는 야마시타는 마닐라를 [[무방비도시]]로 선언하고 잔존부대를 루손 북부의 산악지대로 이동시켜서 지연전을 펼치는 전략을 수립했으나, 당시 마닐라에 남아있던 [[일본군 해군|해군]][[소장(계급)|소장]] 이와부치 산지 [[제독]]과 그가 이끌던 해군 육전대[* 한국식으로 말하면 해병대] 병력이 이 명령을 거부하였다.[* 당시 일본군에는 육해군을 통합한 지휘 계통이 부재하였기 때문. 따라서 한 방어전에서 육군 측 지휘관과 해군 측 지휘관이 동시에 존재하였고, 이 둘의 권한은 '''동등하였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육군과 해군과의 관계가 얼마나 험악했는지]] 증명되는 사건이다. 그나마 육해군 공조가 잘 된 작전이 미국에게는 악몽을 가져다준 [[오키나와 전투]]였는데, 사실 해군 측이 상당부분 군령권을 포기하고 육군 측이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 그나마도 종결 국면에 유격전을 벌이자는 제안을 해군이 해군 보유 요새에서 옥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육군은 이 제안을 '''지금까지 협조해준 해군에 대한 감사'''로 수락하였다. 그런데 [[마닐라 대학살|마닐라에서 벌어진 저 사건]]은 이와부치 산지 해군 ''''[[소장(계급)|소장]]''''이 육군 ''''[[대장(계급)|대장]]''''의 명령을 씹은 거다. 아무리 자기가 속한 집단이 먼저이더라도 저러면 영락없는 [[하극상]]이다.] 해군 육전대는 독단적으로 시가전에 돌입하였고, 그 와중에서 수많은 필리핀인들이 살해되며 이를 [[마닐라 대학살]]이라고 부른다.[* 태평양 전쟁 최후의 전투인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해군 육전대는 후방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방어진에서 최후까지 저항한다. 오키나와에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명예로운 죽음을 바라는 것을 제외하면, 시간 끌기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또 이 때에는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부대 이동 자체가 힘든 상태기도 했다.] 학살과 시가전으로 인해 사망한 민간인만 10만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학살에서도 학살에 참여하지 않고 대민지원을 하며 민간인을 지킨 부대도 있다. [[도미나가 교지]] 휘하의 육군 제4항공군이 그들. 특히 도미나가 교지는 자기 담당 구역에 온 다른 군에게 "우리와 싸우자는 거냐?"라며 학살을 대놓고 막았다.] 결국 해군 육전대는 마닐라 방어에 실패하였다. 해군 육전대 약 16,000여명이 [[옥쇄]]했으며 방어측이 더 유리한 시가전[*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방어측이 제대로 된 전략을 세울 경우는 병력차이와 무장의 차이를 무시하고 거의 교환비가 1대1이 나올 수도 있다. 실례를 들자면 1차 [[걸프전]]에서 미군 본대가 만일 바그다드 시가전을 벌일 경우에는 이전 모든 전투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다.][* 현대 미군 역시 시가전 상황에서 건물 안에 있는 적병 '''1명'''을 안전하게 제압하기 위해서는 최소 '''5명'''이 필요하다고 판단, 건물 확보팀을 운용한다.]에서 두개 사단 병력의 미군에게 약 1,000명의 전사자와 3,000명 수준의 부상자의 피해를 입히는데 그쳤다. 이에 반해 일본군은 미군에 포로로 잡힌 인원까지 합쳐서 300명 정도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당시 방어하는 지형적으로는 유리했겠지만 병력, 장비 등 모든 것이 열세였으며 당장 식량마저 부족해서[* 섬이 미 해군에 의해 봉쇄당한 상황이라 병력보충 및 보급 등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사하는 병사가 속출할 정도였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마닐라에서 민간인 학살이 벌어지는 와중에 일본군은 일본 등 추축국에 우호적이었던 '''중립국 스페인의 영사관에 [[방화|의도적으로 불을 지르고]] [[학살|사람들을 대검으로 찔러 죽여]] 50여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당연히 스페인은 1945년 4월 일본과 외교관계를 단절해버렸다. 그래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7개월에 가깝게 맥아더의 부대를 잡아두는데는 성공했다.[* 교환비 자체는 사상자비가 미군1:일본군40으로 처참하지만 이미 화력에서 차이가 많이 났고 결정적으로 필리핀 주둔군은 일본제국이 재해권, 제공권을 잃는 바람에 제대로 된 지원을 못 받고 싸워야 했기에 사망자의 대다수가 굶주림, 질병 등으로 저 세상 간 비전투 사망자였다. 순수 교환비를 따져보면 1:3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나름 분투했다.] 결국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속에서 부하들의 할복 권유에 '''내가 여기서 죽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책임을 진다'''고 하면서 할복하지 않고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결국 이후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하게 되면서 그의 판단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또는 "천황으로부터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다" 라고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